외가쪽 어른들이 모두 돌아가신 95년 이후로 발길이 뜸해질 수 밖에 없었던 영덕을 다시 찾은 것은, 읍내를 지나 축산면에 있는 작은 마을에 볼일이 있어서였다.
새로이 개통된 대구-포항간 고속국도(일명 대포고속국도)를 타고 1시간 남짓한 시간을 달리자, 익숙한 해변을 끼고 7번 국도의 수려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 수학여행 왔던 학생들이 사진을 찍다 실족사했다는 얘기가 왕왕 들리던 - 보경사가 있는 청하를 지나 두어 개쯤 있는 군부대 위병소를 지나치자, 20년 전쯤엔 까무잡잡한 얼굴에 눈매가 매서운 해병대 헌병들 - 빨간 글씨의 하얀 철모 - 이 버스에 올라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를 외치던 검문소를 만난다.
지금은 교통량이 많이 늘어서인지 아니면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 무장탈영이나 중요한 범인의 도주로 차단 등 - 불심검문이 없어진 탓인지 지나다니는 버스를 세우고 검문검색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새로이 단장한 화진휴게소의 모습과 경보화석박물관,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음식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어촌마을들을 지나치기를 여럿, 그나마 머리속 어느 구석엔가 다소 익숙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강구사거리가 나타난다.
7번 국도와 영덕은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본적이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306번지이기도 하지만, 부모님의 고향이 근처에 자리한 탓도 있고 어릴적 첫 여행에 대한 기억의 대부분이 보통 서너시간은 버스를 타고 외가집에 가던 방학중이나 주말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동에 관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예천, 안동을 거쳐 청송보호감호소가 있는 진보면을 지나가는 5시간 거리의 제1코스와 구미, 경주에 연하는 경부고속국도를 달려 포경산업도로를 지나 7번 국도로 접어드는 제2코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던 유년시절의 외가집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특히 가는 길보다는 돌아오는 길이 더욱 그랬는데, 오랜만에 온 외손자들을 위해서 만들어둔 장류와 마른반찬 등을 잔뜩 싸서 담아주시는 외할머니 덕분에 돌아오는 길 식구들은 빈 손이 없을 정도로 들고, 메고, 짊어지고 버스를 타고 오곤 했었는데, 영덕에서 포항이나 안동까지는 버스가 자주 다녔지만 포항이나 안동에서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터미널에서 체류하는 시간이 무척 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식사 이후 4차선으로 확장된 새로운 7번 국도를 달리며 영덕읍내를 지나칠 무렵,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자주 드나들던 때에는 작은 변화에 둔감해 잘 몰랐던 것들이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근근이 몇 번 들르지 못하는 동안에 큰 변화로 탈바꿈해 이제는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매일이 다분히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 속에서 전동차에 치인 듯 멍한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 동안에 느끼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감각과는 다른 어떤 느낌이 뇌리를 스친다. 하루하루가 빠르게 흘러간다고 느끼면서도 정작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시간의 발자국 소리 자체에 대해서는 둔감했던 내 자신이 아차 싶었다.
길어야 100년, 얼마 주어지지 않은 시간을 알차게 그리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지난 시간의 우유부단함과 부화뇌동에 대한 자숙의 동기를 7번 국도와 영덕의 변화가 부여해준 셈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회상의 강을 건너는 동안, 산산이 조각난 채 강바닥 어딘가에 머물러 있던 기억의 편린을 무수히 건져내며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오는 2월 28일이면, 그간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KT(옛 한국통신공사)의 하이텔(HiTEL) VT 터미널 서비스가 긴 겨울잠을 뒤로 한 채 역사속의 뒤안길로 사라질 예정"이다. 현재 남아 있는 천리안이나 나우누리 같은 여타의 VT 터미널 기반 서비스들도 결국은 하이텔과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임은 마치 역사적인 사명이요 운명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서울지하철 4호선 하행선이 안산, 오이도까지 연장되면서 - 지금은 폐선되어 흉물스러운 철로의 흔적만 남아버린 - 수원에서 인천 소래포구 사이를 오가며 삶의 애환을 실어나르던 수인선 협궤열차의 조금 더 오래된 이야기가 갑자기 떠오르며, 그와 동시에 가슴 한 구석이 찡해옴을 느낀다.
사라져버린 것들이 갖는 허전함과 아쉬움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고속철 KTX가 가져다 주는 고속 이동의 이점과 2시간 생활권이라는 캐치 프레이즈"에 대비되는, "도시 통근형 통일호의 전신인 비둘기호 열차가 주는 느긋한 시골 풍경의 여유"가 그렇고, "현세의 초고속 인프라를 기반으로 한 인터넷 환경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느끼는 편리함과 신속함"에 대비되는 저 옛날 PC 통신 환경의 "책임감이 수반되는 인간미에 대한 향수"가 그럴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인 1991년 10월 2일, MBC 9시 뉴스데스크 시작을 알리는 삼성 돌체 시계의 우렁찬 발자국 소리와 함께, 나는 현대전자의 내장형 2400bps MNP Class 5 모뎀을 구입해 당시 사용하던 - 역시 현대전자의 제품인 - Super 16S XT PC의 슬롯에 장착하고 역사적인 첫 다이얼업(Dial-up) 모뎀을 통한 온라인 담금질을 시작했었다.
당시 내장형 2400BPS 모뎀의 가격은 18만원대였는데, 에러 보정기능과 압축 기능이 있는 MNP Class 5 옵션, 그리고 1200bps 모뎀과 비교했을 때 2배의 전송속도는 그 정도의 비용을 지불할 만큼 정당하다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했었다.
Super 16S - 이하 16S - 는 10MHz 클럭의 인텔의 8086 계열 CPU와 근원을 알 수 없는 ISA 허큘리스 그래픽 보드가 장착되어 있었고, 64KB 메모리칩 8개 또는 32KB 메모리칩 12개로 이루어진 512KB의 메인메모리에 하드디스크도 없이 5.25인치 360KB 2D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만 2개가 덩그러니 전면의 Drive Bay 에 고정되어 있는,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그런 시스템이다.
파란색의 플라스틱 재질 전원 버튼을 누르면, 메인보드와 연결된 점퍼에서 단락을 일으켜 180W 용량의 파워 서플라이가 요란한 굉음을 내며 팬을 가동시키면서 16S가 잠에서 깨어난다.
집에 16S를 두고 있으면서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봤자 CTRL + 엔터키의 조합으로 CPU 의 터보 ON/OFF 토글 기능을 왔다갔다하며 2.77MHz 와 10MHz 의 차이를 몸소 체험해 보는 것과, 겨우 열 개 남짓한 바이러스를 검색하고 치료할 수 있는 - 몽키 바이러스나 브레인 바이러스, 다마네기 바이러스, 예루살렘 바이러스 등 - 안철수님의 V2 PLUS 라는 백신 프로그램을 이용해 시내 모처의 컴퓨터 판매점에서 복사해 온 게임 디스켓의 바이러스를 검사하는 따위의 단조로운 일들 뿐이었다.
그런 시스템에 모뎀을 장착하면서부터는 오프라인 환경에서 우물 안 개구리와 같았던 컴퓨팅 환경이 전화선을 통해 전국 각지에 있는 사람들과 연계되는 온라인 환경으로 변모하면서 무수히 많은 부분이 변화하고 발전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디오텍스(Videotex) 기반의 데이콤의 천리안 II - 지금의 천리안, 97년 이전 한국데이터통신(주)의 PC-Serve 서비스가 전신이다 - 라든가 대우증권 Dial-VAN 같은 증권정보 서비스,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서비스하던 KETEL 서비스 - 지금의 HiTEL 서비스의 전신이다. 한경 KETEL 을 KT에서 인수하면서 유료화로 정책이 변경되었다. - 그리고 전국 각지에 산재한 개인 사용자들의 사설 BBS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서비스들이 모뎀과 전화선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는 '빨리빨리'와 같은 한국인들의 급한 성격을 자극해 지금의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 세계 1위의 제국에 이르는 초석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림 2] 옛 PC-Serve 시절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천리안의 대화오락실에 <이야기 멀티>로 접속한 모습
그도 그럴만한 것이 2400bps 라는 속도가 가져다 주는 한계 - 이후 몇년사이 14400bps 나 28800bps, 33600bps, 더 나아가서는 디지털 전용회선에 맞먹는 56Kbps급 모뎀이 출시되고 널리 보급되었지만 - 는 실로 엄청난 것이어서 1MB 짜리 파일을 다운받기 위해서는 약 1시간 가량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 1MB = 1,024KBytes = 1,048,576Bytes ※ 2400bps = 2400 baud per second 또는 2400 bit per second 로 초당 전송률을 나타냄 ※ 1Byte = 8Bit 이므로, 2400bps 모뎀은 이론적으로 초당 300Bytes를 전송 ※ 1,048,576Bytes 를 300Bytes로 나누면 3,495초가 되는데 이는 분으로 따지면 약 58분이다.
이렇듯 열악한 환경에서 비싼 전화요금과 상용서비스의 경우 분당 이용료까지 부담을 해가며 살인적인 금전투자를 서슴지 않고 계속하면서 PC통신에 몰입할 수 있었던 보이지 않는 저력의 근원은 도대체 무엇일까?
실제 사례를 들어 한번 살펴보면, 서울이나 대구 같은 대도시에는 일찍부터 시내전화요금에 "시분제"라는 것이 도입되어 실제 사용하는 통화량만큼 종량제로 과금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내가 살았던 인구 10만도 안되는 지방의 작은 중소도시에서는 3분에 20원 - 한때는 공중전화에서도 십원짜리 두 개면 넉넉하게 할 말 다 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어렴풋이 기억은 난다 - 이면 끊을 때까지 계속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하루에 한 시간씩 PC-Serve 에 접속해서 채팅이건 동호회 활동이건 여러 가지 유희(?)를 즐긴다고 했을 때, 일단 전화요금은 3분에 20원씩, 하루에 400원, 한 달이면 30일 기준으로 12,000원이 부과된다. 그리고, 지금의 LG데이콤의 전신인 한국데이터통신(주)에서 서비스하던 PC-Serve 의 초창기 이용료는 1분에 25원으로 한시간이면 1,500원 한 달에 30일 기준 45,000원이 부과되었다. 부가가치세 10%를 포함하면 시내전화요금 13,200원 + 통신서비스 이용료 49,500원 해서 합계 52,700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해야만 했던 셈이다.
다행히 PC-Serve 에는 기본료가 부가세 포함해서 사용하지 않아도 11,000원씩 부과가 되었고 이 기본료로는 한 달에 20시간의 사용시간이 기본적으로 제공되었다. 20시간이 많아 보이지만, 채팅하고 이것저것 동호회 둘러보고 자료실 조금 이용하면 하루 2-3시간은 기본적으로 간다. 지금도 "USE" 라는 명령어를 사용해서 매번 사용시간을 체크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중에 시내전화요금이 단계적으로 인상되면서 3분에 35원, 3분에 40원 식으로 계속 올라가면서 바로잡아졌지만 초기에는 전화요금보다 서비스 이용료가 더 큰 그야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상황이 벌어졌던 셈이다.
1992년 2월, PC-Serve 에 바둑동호회를 개설해서 초대 대표시삽을 하는 동안에도, 소비자에게는 살인적이고 회사는 노다지를 캐는 수익구조로 인한 수난은 계속됐다. 이른바, 우수동호회를 선정해서 매월 발표하면서 그에 부합되는 혜택을 부여했는데 운영진에게는 ZS로 시작하는 무료 운영용 아이디를 제공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ZS 뒤에는 일반적으로 바로가기 명령에 해당되는 Go 명령의 뒤에 오는 파라미터와 같은 인덱스명이 따라붙었고, 아이디가 추가로 발급될 경우에는 숫자를 부여했다.
바둑동호회의 경우 GO BADUCK 이라는 인덱스명을 사용했는데, 아이디의 최대 자리수가 8자리였기 때문에 ZSBADUK 이 대표시삽의 아이디였고, ZSBADUK1 이 부시삽1, 그 다음이 ZSBADUK2 식으로 사용시간이 한때 전체 동호회를 통틀어 3위 안에 드는 얼마 동안은 ZSBADUK4까지 총 5개의 무료 아이디를 발급받아 많은 혜택을 봤던 기억이 난다. 그에 수반되는 책임과 의무도 막중했지만 말이다.
[그림 3] 천리안의 텍스트 기반 사용자 정보 수정화면. 6번 항목의 <호출기>가 눈에 띈다.
여담이지만, 충청지역동호회(GO CHUNG)라든가 지금은 인터넷상에서 앳(@)파일이라는 사이트로 변모한 아트미디어 동호회, 게임과 만화를 다뤘던 환상동호회 같은 곳들이 사용시간 기준으로 우수동호회에 자주 올랐던 곳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소는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비용을 부담하면서도 꿋꿋이 부모님이 잘라버린 검정 피복의 구리전화선을 창틀이나 장판, 벽지에 실리콘 총으로 발라버리는 투혼(?)을 발휘하면서까지 계속 PC 통신에 몰입할 수 있었던 저력의 원천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정신 그리고 기본적인 에티켓은 준수하며 서로에 대한 예의를 갖출 줄 알았던 책임감과 더불어 온라인상에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유일한 식별자(Identifier)였던 자기 아이디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현재의 인터넷 환경처럼 가정교육을 파트타임으로 받은 쓰레기 같은 인종들이 난무하는 멀티태스킹의 바다가 아니라, 동호회나 클럽의 소위 '지하실'이라 불리우는 자그마한 채팅방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오로지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던, "멀티태스킹 서버 속 싱글태스크 모드"의 매력 또한 거기에 일조하지 않았을까?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지금은 타이핑만 빠르면 메신저로 양다리 아니라 대여섯 다리도 가능하지만, 그땐 그게 불가능했다. /A 명령어 한 방이면 누가 어디에 가서 무얼 하는지 다 알 수 있었고 - 결국 이것도 유닉스 쉘에 있는 finger 명령의 응용버젼이겠지만 - 채팅실에 입장해 있는 동안 다른데로 이동할 수가 없었다.
온라인 매체에서 하이텔 VT 서비스의 중단 소식을 접하고 나서 참으로 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마치 자주 만나진 못하지만 아주 오래된 벗 하나가 요단강 건너 북망산천으로 훨훨 날아가는 것처럼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옴은 비단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겨울은 몸도 마음도 추워야 하는데 올 겨울은 유난히도 따뜻한 날이 많은 것 같다.
시간은 계속 흐른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흐를 것이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어야 할진대, 문명의 이기가 가져다 준 과거 기억의 편린을, 앨범 속 아주 오래된 한 장의 흑백사진처럼 단지 가슴속에 묻기만 해야 하는 것인지 자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