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칫솔_초이의 IT 휴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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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C 통신을 처음 접한 1991년 이후 온라인상에서의 다른 PC 또는 사용자들과의 연계성에 골몰하며 지냈을 무렵, 사설 벼락쪽(BBS: Bulletin Board System, 전자게시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사용자의 입장에서 케텔(KETEL)이나 PC-Serve와 같은 대형통신망 또는 개인이 운영하던 사설 BBS에 접속해 활동하던 것에서 탈피해 무언가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싶은 욕구에서 발현된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시 내가 보유하고 있던 장비는 고작 메인메모리 512KB, CPU 클럭 10MHz 의 초라한 XT PC 뿐이었고, 지금은 흔하디 흔한 필수장치가 된 하드디스크가 없었다. 사설 BBS 를 오픈하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우선, 보조기억장치의 용량 한계를 뛰어넘어 게시판이나 자료실의 데이터를 저장할 하드디스크를 PC 에 장착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삼성전자와 PC 를 샀던 현대전자 등 여러 군데에 견적을 받고 문의를 한 결과 손에 쥐게 된 것은 시게이트社에서 나온 MFM 방식의 62MB 하드디스크였다. 메가당 5천원이라는 비용부담을 떠안고 62MB 하드디스크를 장착한 후에 MS-DOS 를 부팅하면서 반짝거리는 하드디스크의 전면부 패널의 적색 LED 램프가 반짝거리는 것을 보며 흐뭇했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하드웨어적으로 준비가 된 다음에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것이 바로 호스트 프로그램을 선정하고 셋업해서 정상적으로 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었는데, 이는 예상외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와일드 캣(WildCat)이나 RBBS-PC와 같은 외국산 프로그램이나 곰주인, 밀키웨이, 호롱불과 같은 국산 호스트 프로그램들이 이미 대형 PC통신사의 자료실에 많이 공개되어 있었고, 운영자들이 할 일은 메뉴얼을 숙독해 트리구조로 되어 있는 메뉴파일을 작성하고, 각각의 메뉴에 맞는 스크립트(사용자에게 보여질 화면) 파일을 작성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의외로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대형 통신망과는 달리 지역의 PC통신인들을 위해서 아기자기하고 지역정보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고심했고, 마침내 1992년 4월 최오길님의 호롱불 호스트 3.82C 버젼을 이용해 History NET 이라는 사설 BBS를 오픈하기에 이르렀다.

   도농복합형 도시로 탈바꿈 하기 이전 순수하게 인구 10만명도 안되는 지방의 중소도시에서 PC 통신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초반에는 회원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면서 입에서 입소문을 타고 가입자는 한 명씩 늘어나기 시작해서, 운영을 개시한 지 약 2개월이 지났을 무렵에는 회원수가 약 50명에 이르렀다.

   시내에 있는 교회의 목사님이나 컴퓨터 가게 사장님, 그리고 같은 학교에 재학중이던 친구, 선후배들을 필두로 점점 접속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인근의 구미에서는 이 무렵 모처의 컴퓨터 가게에서 운영하던 "선주골"이라는 멀티노드 사설 BBS가 운영중이었는데, 유닉스와 유사한 제닉스 OS 기반에 호스트 프로그램을 얹어 최대 4명까지 동시에 사용이 가능했다.

   컴퓨터 가게가 아닌 개인 입장에서 그것도 10대가 거액의 투자비용이 들어가는 멀티 시리얼 카드나 외장형 모뎀, 그리고 전화선 등을 설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단일노드 환경의 BBS에서 무언가 더 발전시킬 만한 촉매가 없을까 고민하던 차 호롱불 호스트에 있는 네트메일 기능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이는 지금의 인터넷 메일을 주고 받는 시스템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듯 싶다.

   호롱불 호스트의 네트메일 시스템은 A 라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중앙국"이 하나 존재하며, - 중앙국은 호롱불의 개발자인 최오길님과 또 다른 한 사람이 운영했고, "알파넷"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 이 중앙국은 각 지역별로 다수의 중계국을 두게 되고, 이 중계국은 또 다시 하위에 다수의 회원국을 가지는 이른바 트리구조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면서 동일한 호롱불을 호스트로 사용하는 BBS 간에 메일이나 게시물을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 운영되는 것이다.

   나는 당시 공석이던 경북지역 중계국 노드로 가입을 신청했고, 중앙국인 알파넷에서 승인이 떨어져 노드리스트 파일과 네트메일에 필요한 몇 가지 부수적인 파일들을 중앙국으로부터 전화접속을 통해 제공받은 뒤 실질적으로 구동이 가능하게끔 약간의 부수적인 설정을 호스트 프로그램에 맞춰주는 작업을 했고, 이후 경북중계국으로 서울의 중앙국인 알파넷에 네트메일을 위한 첫 자동접속을 지켜보던 그 때의 기분은 정말 환희 그 자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설 BBS의 운영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비공식적으로 김천에서는 제1호 단일노드 사설 BBS 개국 기록을 남겼고, 집에서 사용하던 KT 의 일반전화를 같이 사용하는 것이었기에 24시간 운영을 하지 못하고 - 당시의 사설 BBS 들 대부분이 야간에 제한적으로 운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 22시부터 06시까지 하루에 8시간씩만 운영했지만, 사용자들 대부분 역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주간에는 접속할 여건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그다지 큰 문제는 없었다.  

   인터넷 기반의 Telnet, Gopher, FTP 같은 서비스나 지금의 웹 포털들이 자리잡기 전까지 수많은 경험을 하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과 서비스들을 접해보았지만, 약 1년간 이어졌던 이 사설 BBS 운영 시절만큼 색다르고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은 이후에 없었던 것 같다.

   아쉬운 게 있다면, 단일노드 환경이라 운영자(SYSOP: System Operator)와 접속한 사용자 단 둘만이 존재하는 - 지금의 멀티태스킹과 멀티유져가 보편화된 시점에서는 엉성하고 어딘가 어색하기 그지없는 - 공간이라 조금은 답답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관심사와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밤새워 토론하고 이야기하던 문화 자체를 즐기던 경향과 더불어 익명성을 배제한 채 서로에 대한 예의를 갖출 줄 알았던 그 시절, 동시대를 살았던 절대 다수 통신인들의 에티켓에 경의를 표하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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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4 23:18 2007/03/04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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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리얼텔레콤에서 시판중인 012 무선호출기 제품들(일부 지역호출기 제외)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1] 에지 스파이(광역)               [사진 2] 맥스텔 리얼콜(수도권)         [사진 3] 와이드T.C 메녹스(수도권)

   1인 1휴대폰 시대로 일컬어지는 현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잘 느끼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 나를 포함하여 - 우리나라에도 분명 이동통신의 암흑기 내지는 과도기적인 단계가 존재했는데, 세일즈맨이나 긴급한 연락메세지를 신속하게 수신하고 그에 응신해야 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무선호출기 - 일명 삐삐 - 라 불리우는 기기를 허리에 차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지하에서는 잘 터지지 않는데다가 삐삐를 가진 사람들끼리 연락하려면 음성메세지를 녹음하고 그것을 청취하기 위해서 공중전화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벌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휴대폰의 보급으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 지금의 공중전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인 셈이다.

   지역삐삐의 경우 필자는 광역삐삐가 생산 및 시판되기 이전에는 대구/경북권 사업자인 세림이동통신의 015 서비스를 사용하다가 1994년 7월경 텔슨전자의 최초 광역무선호출기인 왑스(WAPS)가 출시되면서 SK-Telecom의 012로 옮겨탄 전력을 가지고 있다. 이때 개통했던 왑스는 012-211-1715 라는 다소 생소한(?) 번호로 이후 약 3년간 뒤에 언급된 신세기통신의 017 셀룰러 폰을 구매하기 이전까지 외출시 꼭 챙겨야 할 필수품 제1호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광역무선호출기 또한 맹점이 있었으니 지역을 이동하게 되면 해당 지역으로 무선호출기의 서비스 지역 선택내역을 맞추어 주고, 전화를 통해 서비스권역을 등록해 주어야만 제대로 수신이 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어, 대구에서 서울로 기차를 타고 이동한다고 가정하면 대구에서 왜관, 김천을 지나 영동역으로 들어갈 무렵에 충북권역으로 1회, 다시 영동에서 대전으로 들어갈 무렵 충남권역으로 1회, 대전에서 조치원, 천안을 거쳐 오산으로 들어갈 무렵 서울/수도권으로 1회 등 무려 3회의 서비스 권역 설정을 맞추어야 주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기차 안에 타고 있으면서 전화를 걸어서 이동통신 서비스 권역을 변경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그렇다고 서비스 지역이 변경되는 역에 열차가 정차할 때마다 플랫폼에 뛰어내려가서 짧게는 30초 길게는 1분인 정차시간내에 공중전화를 걸어 서비스지역을 바꾸고 다시 열차에 탄다는 것 또한 환장할 노릇이다. -_-b

   그래서, 부득이하게 대구에서 서울을 갈 때는 김천 인근 추풍령 정도까지는 대구/경북권 서비스를 받아서 제대로 호출기가 터지고 황간을 지나 영동으로 진입할 무렵부터 서울에 도착해 전화를 걸기 전까지는 광역호출기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먹통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또는 머리가 좀 돌아가는 人이라면, 아예 대구에서 전화를 걸어 서울/경기로 서비스권역을 미리 변경해두고 열차에 승차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었다.

   이러한 무선호출기의 단방향성을 극복하고자 지금의 셀룰러 폰이나 PCS 이전에 "씨티폰"이라는 기기가 잠시 - 아주 잠깐이었다 - 인기 상한가를 구가하며 등장했던 때가 있었는데, 한국통신(지금의 KT) 공중전화 박스에 씨티폰 전파를 중계하는 장치를 장착하고 박스에서 반경 100미터 이내에 위치한 곳에서는 어디든지 발신이 가능한 그야말로 발신 전용의 획기적인 상품으로 떠올랐다. - 말 그대로 획기적일 뿐이었지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한 것은 아니었다 -

   씨티폰은 일종의 젠더 역할을 하는 케이블을 이용하면 노트북에 연결해 마치 집에서 PC통신을 하듯이 하이텔이나 천리안 등의 서비스에 접속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이동성과 휴대성을 겸비한 통신수단이었지만, 전파의 도달거리가 공중전화 박스 인근으로 한정되고 통화자와 공중전화 박스의 중계장비 사이에 대형버스 한 대만 지나가도 통화가 단절되는 극악(?)의 안정성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기도 했던 애물단지같은 존재였다. 더구나 수신이 되지 않는다는 "발신전용"의 낙인은 그 외면의 정도를 더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았다.

   실례로, 모 학교 노천극장에서 씨티폰과 구형 노트북을 이용해 하이텔에 접속해서 서비스를 사용하던 중에 공중전화 박스와 나 사이에 차량이 수시로 지나다니자 계속 화면에 노이즈가 끼거나 접속이 단절되는 등의 현상으로 인해 엄청난 짜증을 유발하는 것을 확인했던 적도 있다.


   인터넷 참여연대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 1999년 4월 9일자 자료

   한국통신의 씨티폰 사업 퇴출에 대한 우리의 입장
   먹통 씨티폰, 퇴출이 끝 아니다 / 정책실패·사업실패 책임규명, 소비자피해 보상 있어야
 
   한국통신이 불량 통화품질로 소비자들의 원성을 받아오던 씨티폰 사업을 퇴출한다는 입장을 밝혔다(중앙일보 4월 8일자 1면). 씨티폰 사업은 그 시작부터 이미 실패가 예정된 사업이었다. 지난 97년 7월 서비스를 시작한 시기는 이미 휴대폰 서비스가 대중화 단계에 있었으며, 개인휴대통신(PCS)이 서비스 공급을 목전에 둔 상태였다. 따라서 기지국반경 100m 이내의 발신전용 이동통신인 씨티폰 사업은 타 통신서비스에 비해 품질은 물론 가격면에서도(초기 시티폰 기본요금 7500원)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밀한 수요예측과 시장전망 없이 사업을 결정함에 따라 수천억원에 달하는 투자손실만 남긴채 사업포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같은 과정은 통신정책의 명백한 실패이다. 씨티폰 사업 퇴출에 앞서 정부는 이같은 정책실패의 원인과 책임을 보다 분명히 가려야 할 것이다.

   그간 씨티폰 통화불량으로 인해 많은 소비자들이 기본료등 금전적 피해와 정신적 고통을 당하였다. 그러나, 사업자인 한국통신측은 이같은 소비자들의 피해와 기본료 환불요구를 일관되게 외면해 왔다. 이처럼 소비자 피해에 대해 아무런 보상대책도 없고 현 이용자에 대한 뚜렷한 사후대책도 없이 일방적으로 사업퇴출을 선언하는 한국통신의 태도는 공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몰각한 비윤리적 처사이며, 통신독점사업자의 부당한 횡포에 다름아닌 것이다.

   우리는 한국통신측에 다시한 번 씨티폰 통화불량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기본료반환을 포함한 소비자 피해에 대한 보상대책을 조속히 수립할 것을 촉구한다. 아울러 퇴출에 따른 현 씨티폰 이용자들에 대한 명확한 대책의 수립도 따라야 할 것이다.

   참여연대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는 이후 정보통신부와 국회, 감사원등 제반 관계기관에 질의, 진정, 감사청구등을 통해 씨티폰 사업실패의 책임을 가리고 소비자 피해에 대한 보상을 촉구하는 활동을 지속해 나갈 것이다.


   1997년, 새로이 등장한 PCS 에 의해 무선호출기 시장이 몰락하며 SK-Telecom 의 012 나 지방권역 무선호출사업자의 015 서비스가 역사속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2001년 SK-Telecom 의 전국망 무선호출사업권을 인수한 리얼텔레콤에서 유일하게 지역단위 및 광역단위 무선호출서비스와 문자수신서비스를 제공중에 있으며, 앞으로도 무선호출 기지국이 남아 있는 한은 서비스가 지속될 전망이다.

   2006년 정보통신부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42,000여명의 무선호출 서비스 가입자가 존재하며 이 중 대다수는 증권정보 서비스를 제공받는 이용자들이지만, 1만여명의 "진짜" 삐삐사용자들이 아직 유료로 한 달 8,000원에서 1만원이 조금 넘는 대가를 지불하고 무선호출 서비스를 애용하고 있다. 의사들이나 긴급한 연락을 요하는 직종 종사자에 국한되는 현상이지만 말이다.

   2007년 2월 현재 광역 및 지역별 무선호출기 구매와 가입은 디아이티에서 운영하는 사이트 "I love beep" 에서 가능하며, Daum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삐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결성되어 변치 않는 무선호출기 사랑을 과시하고 있다.

    시도 때도 울려대는 휴대전화를 뒤로 하고 선택한 사람에게 원하는 시간대에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것을 1차 목표로, 삐삐나 휴대폰 같은 개인 휴대형 이동통신 기기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궁극의 경지(?)를 점령하기 위한 첫 발을 내딛어 보는 것도 괜찮은 행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요즘처럼 사무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울려대는 휴대폰이나 MFC 전화기의 벨 소리에 진한 노이로제를 느끼는 시기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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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7 02:45 2007/02/17 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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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 호환기종의 ISA 슬롯에 장착되던 내장형 팩스모뎀
  [사진 1] IBM 호환 기종 PC의 ISA 슬롯에 장착되던 내장형 팩스 겸용 모뎀


   "오는 2월 28일이면, 그간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KT(옛 한국통신공사)의 하이텔(HiTEL) VT 터미널 서비스가 긴 겨울잠을 뒤로 한 채 역사속의 뒤안길로 사라질 예정"이다. 현재 남아 있는 천리안이나 나우누리 같은 여타의 VT 터미널 기반 서비스들도 결국은 하이텔과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임은 마치 역사적인 사명이요 운명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서울지하철 4호선 하행선이 안산, 오이도까지 연장되면서 - 지금은 폐선되어 흉물스러운 철로의 흔적만 남아버린 - 수원에서 인천 소래포구 사이를 오가며 삶의 애환을 실어나르던 수인선 협궤열차의 조금 더 오래된 이야기가 갑자기 떠오르며, 그와 동시에 가슴 한 구석이 찡해옴을 느낀다.

   사라져버린 것들이 갖는 허전함과 아쉬움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고속철 KTX가 가져다 주는 고속 이동의 이점과 2시간 생활권이라는 캐치 프레이즈"에 대비되는, "도시 통근형 통일호의 전신인 비둘기호 열차가 주는 느긋한 시골 풍경의 여유"가 그렇고, "현세의 초고속 인프라를 기반으로 한 인터넷 환경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느끼는 편리함과 신속함"에 대비되는 저 옛날 PC 통신 환경의 "책임감이 수반되는 인간미에 대한 향수"가 그럴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인 1991년 10월 2일, MBC 9시 뉴스데스크 시작을 알리는 삼성 돌체 시계의 우렁찬 발자국 소리와 함께, 나는 현대전자의 내장형 2400bps MNP Class 5 모뎀을 구입해 당시 사용하던 - 역시 현대전자의 제품인 - Super 16S XT PC의 슬롯에 장착하고 역사적인 첫 다이얼업(Dial-up) 모뎀을 통한 온라인 담금질을 시작했었다.

   당시 내장형 2400BPS 모뎀의 가격은 18만원대였는데, 에러 보정기능과 압축 기능이 있는 MNP Class 5 옵션, 그리고 1200bps 모뎀과 비교했을 때 2배의 전송속도는 그 정도의 비용을 지불할 만큼 정당하다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했었다.

   Super 16S - 이하 16S - 는 10MHz 클럭의 인텔의 8086 계열 CPU와 근원을 알 수 없는 ISA 허큘리스 그래픽 보드가 장착되어 있었고, 64KB 메모리칩 8개 또는 32KB 메모리칩 12개로 이루어진 512KB의 메인메모리에 하드디스크도 없이 5.25인치 360KB 2D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만 2개가 덩그러니 전면의 Drive Bay 에 고정되어 있는,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그런 시스템이다.

   파란색의 플라스틱 재질 전원 버튼을 누르면, 메인보드와 연결된 점퍼에서 단락을 일으켜 180W 용량의 파워 서플라이가 요란한 굉음을 내며 팬을 가동시키면서 16S가 잠에서 깨어난다.

   집에 16S를 두고 있으면서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봤자 CTRL + 엔터키의 조합으로 CPU 의 터보 ON/OFF 토글 기능을 왔다갔다하며 2.77MHz 와 10MHz 의 차이를 몸소 체험해 보는 것과, 겨우 열 개 남짓한 바이러스를 검색하고 치료할 수 있는 - 몽키 바이러스나 브레인 바이러스, 다마네기 바이러스, 예루살렘 바이러스 등 - 안철수님의 V2 PLUS 라는 백신 프로그램을 이용해 시내 모처의 컴퓨터 판매점에서 복사해 온 게임 디스켓의 바이러스를 검사하는 따위의 단조로운 일들 뿐이었다.

   그런 시스템에 모뎀을 장착하면서부터는 오프라인 환경에서 우물 안 개구리와 같았던 컴퓨팅 환경이 전화선을 통해 전국 각지에 있는 사람들과 연계되는 온라인 환경으로 변모하면서 무수히 많은 부분이 변화하고 발전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디오텍스(Videotex) 기반의 데이콤의 천리안 II - 지금의 천리안, 97년 이전 한국데이터통신(주)의 PC-Serve 서비스가 전신이다 - 라든가 대우증권 Dial-VAN 같은 증권정보 서비스,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서비스하던 KETEL 서비스 - 지금의 HiTEL 서비스의 전신이다. 한경 KETEL 을 KT에서 인수하면서 유료화로 정책이 변경되었다. - 그리고 전국 각지에 산재한 개인 사용자들의 사설 BBS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서비스들이 모뎀과 전화선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는 '빨리빨리'와 같은 한국인들의 급한 성격을 자극해 지금의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 세계 1위의 제국에 이르는 초석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 2] 옛 PC-Serve 시절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천리안의 대화오락실에 <이야기 멀티>로 접속한 모습

   그도 그럴만한 것이 2400bps 라는 속도가 가져다 주는 한계 - 이후 몇년사이 14400bps 나 28800bps, 33600bps, 더 나아가서는 디지털 전용회선에 맞먹는 56Kbps급 모뎀이 출시되고 널리 보급되었지만 - 는 실로 엄청난 것이어서 1MB 짜리 파일을 다운받기 위해서는 약 1시간 가량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 1MB = 1,024KBytes = 1,048,576Bytes
    ※ 2400bps = 2400 baud per second 또는 2400 bit per second 로 초당 전송률을 나타냄
    ※ 1Byte = 8Bit 이므로, 2400bps 모뎀은 이론적으로 초당 300Bytes를 전송
    ※ 1,048,576Bytes 를 300Bytes로 나누면 3,495초가 되는데 이는 분으로 따지면 약 58분이다.

  
   이렇듯 열악한 환경에서 비싼 전화요금과 상용서비스의 경우 분당 이용료까지 부담을 해가며 살인적인 금전투자를 서슴지 않고 계속하면서 PC통신에 몰입할 수 있었던 보이지 않는 저력의 근원은 도대체 무엇일까?

   실제 사례를 들어 한번 살펴보면, 서울이나 대구 같은 대도시에는 일찍부터 시내전화요금에 "시분제"라는 것이 도입되어 실제 사용하는 통화량만큼 종량제로 과금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내가 살았던 인구 10만도 안되는 지방의 작은 중소도시에서는 3분에 20원 - 한때는 공중전화에서도 십원짜리 두 개면 넉넉하게 할 말 다 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어렴풋이 기억은 난다 - 이면 끊을 때까지 계속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하루에 한 시간씩 PC-Serve 에 접속해서 채팅이건 동호회 활동이건 여러 가지 유희(?)를 즐긴다고 했을 때, 일단 전화요금은 3분에 20원씩, 하루에 400원, 한 달이면 30일 기준으로 12,000원이 부과된다. 그리고, 지금의 LG데이콤의 전신인 한국데이터통신(주)에서 서비스하던 PC-Serve 의 초창기 이용료는 1분에 25원으로 한시간이면 1,500원 한 달에 30일 기준 45,000원이 부과되었다. 부가가치세 10%를 포함하면 시내전화요금 13,200원 + 통신서비스 이용료 49,500원 해서 합계 52,700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해야만 했던 셈이다.

   다행히 PC-Serve 에는 기본료가 부가세 포함해서 사용하지 않아도 11,000원씩 부과가 되었고 이 기본료로는 한 달에 20시간의 사용시간이 기본적으로 제공되었다. 20시간이 많아 보이지만, 채팅하고 이것저것 동호회 둘러보고 자료실 조금 이용하면 하루 2-3시간은 기본적으로 간다. 지금도 "USE" 라는 명령어를 사용해서 매번 사용시간을 체크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중에 시내전화요금이 단계적으로 인상되면서 3분에 35원, 3분에 40원 식으로 계속 올라가면서 바로잡아졌지만 초기에는 전화요금보다 서비스 이용료가 더 큰 그야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상황이 벌어졌던 셈이다.

   1992년 2월, PC-Serve 에 바둑동호회를 개설해서 초대 대표시삽을 하는 동안에도, 소비자에게는 살인적이고 회사는 노다지를 캐는 수익구조로 인한 수난은 계속됐다. 이른바, 우수동호회를 선정해서 매월 발표하면서 그에 부합되는 혜택을 부여했는데 운영진에게는 ZS로 시작하는 무료 운영용 아이디를 제공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ZS 뒤에는 일반적으로 바로가기 명령에 해당되는 Go 명령의 뒤에 오는 파라미터와 같은 인덱스명이 따라붙었고, 아이디가 추가로 발급될 경우에는 숫자를 부여했다.

   바둑동호회의 경우 GO BADUCK 이라는 인덱스명을 사용했는데, 아이디의 최대 자리수가 8자리였기 때문에 ZSBADUK 이 대표시삽의 아이디였고, ZSBADUK1 이 부시삽1, 그 다음이 ZSBADUK2 식으로 사용시간이 한때 전체 동호회를 통틀어 3위 안에 드는 얼마 동안은 ZSBADUK4까지 총 5개의 무료 아이디를 발급받아 많은 혜택을 봤던 기억이 난다. 그에 수반되는 책임과 의무도 막중했지만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 3] 천리안의 텍스트 기반 사용자 정보 수정화면. 6번 항목의 <호출기>가 눈에 띈다.

   여담이지만, 충청지역동호회(GO CHUNG)라든가 지금은 인터넷상에서 앳(@)파일이라는 사이트로 변모한 아트미디어 동호회, 게임과 만화를 다뤘던 환상동호회 같은 곳들이 사용시간 기준으로 우수동호회에 자주 올랐던 곳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소는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비용을 부담하면서도 꿋꿋이 부모님이 잘라버린 검정 피복의 구리전화선을 창틀이나 장판, 벽지에 실리콘 총으로 발라버리는 투혼(?)을 발휘하면서까지 계속 PC 통신에 몰입할 수 있었던 저력의 원천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정신 그리고 기본적인 에티켓은 준수하며 서로에 대한 예의를 갖출 줄 알았던 책임감과 더불어 온라인상에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유일한 식별자(Identifier)였던 자기 아이디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현재의 인터넷 환경처럼 가정교육을 파트타임으로 받은 쓰레기 같은 인종들이 난무하는 멀티태스킹의 바다가 아니라, 동호회나 클럽의 소위 '지하실'이라 불리우는 자그마한 채팅방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오로지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던, "멀티태스킹 서버 속 싱글태스크 모드"의 매력 또한 거기에 일조하지 않았을까?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지금은 타이핑만 빠르면 메신저로 양다리 아니라 대여섯 다리도 가능하지만, 그땐 그게 불가능했다. /A 명령어 한 방이면 누가 어디에 가서 무얼 하는지 다 알 수 있었고 - 결국 이것도 유닉스 쉘에 있는 finger 명령의 응용버젼이겠지만 - 채팅실에 입장해 있는 동안 다른데로 이동할 수가 없었다.
   
   온라인 매체에서 하이텔 VT 서비스의 중단 소식을 접하고 나서 참으로 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마치 자주 만나진 못하지만 아주 오래된 벗 하나가 요단강 건너 북망산천으로 훨훨 날아가는 것처럼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옴은 비단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겨울은 몸도 마음도 추워야 하는데 올 겨울은 유난히도 따뜻한 날이 많은 것 같다.
  
   시간은 계속 흐른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흐를 것이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어야 할진대,
    문명의 이기가 가져다 준 과거 기억의 편린을,
    앨범 속 아주 오래된 한 장의 흑백사진처럼
    단지 가슴속에 묻기만 해야 하는 것인지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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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7 00:49 2007/02/07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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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희 | 2007/08/17 07:09 | PERMALINK | EDIT/DEL | REPLY
현대 슈퍼 16s XT컴퓨터.. 저도 그 컴퓨터를 가지고 있었죠. 날짜까지 기억나는군요. 구입했던 날이 1990년 3월 1일.. 삼일절.. 단지 다른거는 제 기억에 (저도 초등학교 당시 국민학교 4학년때라) 메모리가 640kb였었고,, (덕분에 드라큘라나 부르스 브라더스 라는 오락이 가능했다는 ㅎ) 터보 on/off 기능을 쓸때 평상시는 10MHz 에서 4.xx Mhz로 바뀌었는거 같네요. 그러다가 1995년 5월 16일 (중3때 우리 중학교 개교기념일) 되서 2400모뎀을 구해서 처음 설치하고 전화선 연결해서 ATDT01410으로 접속했던것이 떠오르는군요.
그러다가 전화비로 12만원이 청구되어 (당시 3분에 20원 하던 시절), 엄마한테 맞았던 기억까지 나는군요 훗

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때는 채팅방에서 채팅을 해도 자유와 책임이 동시에 수반되던 시절이었으니..
지금 인터넷 하는 맛은 그때를 따라갈 수가 없나 봅니다.

님 게시물 보고 옛 생각이 떠올라서 들렀다 갑니다.
Laysys | 2007/08/19 04:16 | PERMALINK | EDIT/DEL
반갑습니다.
저 역시도 제가 살던 중소도시엔 없는 접속포트 때문에 시외접속을 주로 하다보니 언젠가 전화요금이 50만원이 넘게 청구되서 반 죽다 살아난 적이 있습니다. -_-b
돈도 더 적게 들고 더 빨라졌는데도 불구하고 옛날 생각하면 참 요즘은 재미없다는 게 공통적인 생각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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