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가면서 느끼게 되는 것들 중 한 가지는, 같은 사물과 장소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유년기에 굉장히 넓어 보이던 편도 2차선의 등하교길이, 서울이나 수도권의 훨씬 넓게 뚫린 도로를 달리며 살다 오랜만에 내려오면 아주 좁게 느껴진다던가 하는 경험 말이다.
사람의 환경 적응력이 워낙 빠른 탓에서 기인하는 착시현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떨 때에는 놀라움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이것은 아주 오랜만에 접하는 사물일수록 그 파급효과는 상상 이상이다. 예를 들어, 20년 만에 옛 기억을 더듬어 골목길을 찾아갔을 때 옛날 그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길을 목전에 마주대하게 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평온함을 느낀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면 지도가 바뀌는 현대에서는 이렇듯 20년 동안 지형지물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이때, 조금 변한 채로 남아 있는 길에서는 약간의 신선함과 함께 '옛날엔 길이 이렇게 되어 있었는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가장 최악의 경우는 아예 길이 없어진 경우이다. 관악구 신림동 인근의 "난곡택지개발지구"라든가 충주댐 건설로 인해 수몰된 충북 단양군의 수 개 마을들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물 사진보다는 아무도 없는 풍경 사진을 찍고 기록하는 것에 집착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언제 무엇이 바뀌어 있을지 모르는 스피디한 세상에서, 증인 없는 나의 과거로 가는 유일무이한 열쇠이자 회상의 창이기 때문에…
소학교에 다녔던 사람들이 국민학교로 개칭되고 나서 받는 느낌이 이와 비슷했을까. 나는 국민학교를 다녔었고 졸업 이후에 제국주의가 남긴 산물이라 해서 개칭되었지만, 아직 나는 국민학교란 말이 더 살갑게 느껴진다. 사상과 이념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웅장한 무언가를 논하기 이전에, "내가 다녔던 학교의 명칭이 그랬기 때문에"라는 단순한 논리로 치부해버리면 그만이다.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하던 날, 노래 한 곡 불러볼 사람 없느냐는 선생님 말씀에 로봇 만화영화 1<날아라 스타에이스> 주제가를 멋지게 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로부터 학교는 스물세 살이나 더 먹어버렸지만, 변함없는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아마도 10년, 아니 20년이 지나 다시 찾았을 때에도 똑같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맞아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날아라 스타에이스>는 <은하철도 999>로 유명한 마쓰모토 레이지의 작품이다. 일본에서는 1977년 3월 6일 첫 방영을 시작해서 1978년 3월 26일을 끝으로 56화 전편이 방영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7년 뒤인 1985년에 방영되었다. [Back]
중학교에 갓 입학했을 무렵이니 지금으로부터 약 15~16년 전에 다니던 동네 이용소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얼마 전 예전에 살던 동네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가 쓸데없는 호기심이 발동한 관계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다가 이용소를 발견하고선 한 컷.
내가 다녔던 이 이용소에는 무수히 많은 종류의 만화책 단행본들이 있었고, 그때만 해도 두발 자유화라고는 꿈도 못 꿀 시절이었기 때문에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덥수룩해진 짧은 머리를 다듬으러 미용실이든 이발소든 가야만 했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는 미용실이 없었고, 주로 토요일이나 일요일의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서 급작스럽게 두발 정리(?)를 해야만 했던 나는 집에서 3분 거리인 이곳을 애용했는데, 사실은 제사보다는 제삿밥에 관심이 더 있다고 이발은 20분 만에 황급히 해치우고, 만화책 보는데 두 시간씩 투자했던 기억이 난다.
밖에서 안쪽을 들여다보니 이발사 아저씨도 그대로인 것 같다. IMF도 지나고 작년의 미국에서 촉발된 금융위기도 있었지만 역시 사람 신체에 관련된 서비스 업종은 경기를 별로 안 타는듯하다.
PC 통신을 처음 접한 1991년 이후 온라인상에서의 다른 PC 또는 사용자들과의 연계성에 골몰하며 지냈을 무렵, 사설 벼락쪽(BBS: Bulletin Board System, 전자게시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사용자의 입장에서 케텔(KETEL)이나 PC-Serve와 같은 대형통신망 또는 개인이 운영하던 사설 BBS에 접속해 활동하던 것에서 탈피해 무언가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싶은 욕구에서 발현된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시 내가 보유하고 있던 장비는 고작 메인메모리 512KB, CPU 클럭 10MHz 의 초라한 XT PC 뿐이었고, 지금은 흔하디 흔한 필수장치가 된 하드디스크가 없었다. 사설 BBS 를 오픈하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우선, 보조기억장치의 용량 한계를 뛰어넘어 게시판이나 자료실의 데이터를 저장할 하드디스크를 PC 에 장착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삼성전자와 PC 를 샀던 현대전자 등 여러 군데에 견적을 받고 문의를 한 결과 손에 쥐게 된 것은 시게이트社에서 나온 MFM 방식의 62MB 하드디스크였다. 메가당 5천원이라는 비용부담을 떠안고 62MB 하드디스크를 장착한 후에 MS-DOS 를 부팅하면서 반짝거리는 하드디스크의 전면부 패널의 적색 LED 램프가 반짝거리는 것을 보며 흐뭇했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하드웨어적으로 준비가 된 다음에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것이 바로 호스트 프로그램을 선정하고 셋업해서 정상적으로 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었는데, 이는 예상외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와일드 캣(WildCat)이나 RBBS-PC와 같은 외국산 프로그램이나 곰주인, 밀키웨이, 호롱불과 같은 국산 호스트 프로그램들이 이미 대형 PC통신사의 자료실에 많이 공개되어 있었고, 운영자들이 할 일은 메뉴얼을 숙독해 트리구조로 되어 있는 메뉴파일을 작성하고, 각각의 메뉴에 맞는 스크립트(사용자에게 보여질 화면) 파일을 작성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의외로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대형 통신망과는 달리 지역의 PC통신인들을 위해서 아기자기하고 지역정보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고심했고, 마침내 1992년 4월 최오길님의 호롱불 호스트 3.82C 버젼을 이용해 History NET 이라는 사설 BBS를 오픈하기에 이르렀다.
도농복합형 도시로 탈바꿈 하기 이전 순수하게 인구 10만명도 안되는 지방의 중소도시에서 PC 통신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초반에는 회원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면서 입에서 입소문을 타고 가입자는 한 명씩 늘어나기 시작해서, 운영을 개시한 지 약 2개월이 지났을 무렵에는 회원수가 약 50명에 이르렀다.
시내에 있는 교회의 목사님이나 컴퓨터 가게 사장님, 그리고 같은 학교에 재학중이던 친구, 선후배들을 필두로 점점 접속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인근의 구미에서는 이 무렵 모처의 컴퓨터 가게에서 운영하던 "선주골"이라는 멀티노드 사설 BBS가 운영중이었는데, 유닉스와 유사한 제닉스 OS 기반에 호스트 프로그램을 얹어 최대 4명까지 동시에 사용이 가능했다.
컴퓨터 가게가 아닌 개인 입장에서 그것도 10대가 거액의 투자비용이 들어가는 멀티 시리얼 카드나 외장형 모뎀, 그리고 전화선 등을 설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단일노드 환경의 BBS에서 무언가 더 발전시킬 만한 촉매가 없을까 고민하던 차 호롱불 호스트에 있는 네트메일 기능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이는 지금의 인터넷 메일을 주고 받는 시스템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듯 싶다.
호롱불 호스트의 네트메일 시스템은 A 라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중앙국"이 하나 존재하며, - 중앙국은 호롱불의 개발자인 최오길님과 또 다른 한 사람이 운영했고, "알파넷"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 이 중앙국은 각 지역별로 다수의 중계국을 두게 되고, 이 중계국은 또 다시 하위에 다수의 회원국을 가지는 이른바 트리구조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면서 동일한 호롱불을 호스트로 사용하는 BBS 간에 메일이나 게시물을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 운영되는 것이다.
나는 당시 공석이던 경북지역 중계국 노드로 가입을 신청했고, 중앙국인 알파넷에서 승인이 떨어져 노드리스트 파일과 네트메일에 필요한 몇 가지 부수적인 파일들을 중앙국으로부터 전화접속을 통해 제공받은 뒤 실질적으로 구동이 가능하게끔 약간의 부수적인 설정을 호스트 프로그램에 맞춰주는 작업을 했고, 이후 경북중계국으로 서울의 중앙국인 알파넷에 네트메일을 위한 첫 자동접속을 지켜보던 그 때의 기분은 정말 환희 그 자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설 BBS의 운영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비공식적으로 김천에서는 제1호 단일노드 사설 BBS 개국 기록을 남겼고, 집에서 사용하던 KT 의 일반전화를 같이 사용하는 것이었기에 24시간 운영을 하지 못하고 - 당시의 사설 BBS 들 대부분이 야간에 제한적으로 운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 22시부터 06시까지 하루에 8시간씩만 운영했지만, 사용자들 대부분 역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주간에는 접속할 여건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그다지 큰 문제는 없었다.
인터넷 기반의 Telnet, Gopher, FTP 같은 서비스나 지금의 웹 포털들이 자리잡기 전까지 수많은 경험을 하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과 서비스들을 접해보았지만, 약 1년간 이어졌던 이 사설 BBS 운영 시절만큼 색다르고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은 이후에 없었던 것 같다.
아쉬운 게 있다면, 단일노드 환경이라 운영자(SYSOP: System Operator)와 접속한 사용자 단 둘만이 존재하는 - 지금의 멀티태스킹과 멀티유져가 보편화된 시점에서는 엉성하고 어딘가 어색하기 그지없는 - 공간이라 조금은 답답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관심사와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밤새워 토론하고 이야기하던 문화 자체를 즐기던 경향과 더불어 익명성을 배제한 채 서로에 대한 예의를 갖출 줄 알았던 그 시절, 동시대를 살았던 절대 다수 통신인들의 에티켓에 경의를 표하고 싶은 밤이다.
살을 에일 듯한 추위가 온몸을 엄습하는 겨울날 새벽, 서울가는 첫 열차를 타기 위해 플랫폼에 서 있었던 기억은 비단 나 혼자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를 종단하는 제2의 철도인 경부선이 지나가는 축복받은(?) 땅에서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자랐던 나는 더더욱 그런 기억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서울과 부산 사이의 경부선과 영주로 향하는 경북선이 분기하는 곳, 경북 김천시.
1948년에 포항, 수원과 함께 시로 승격되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살고 있는 사람의 머릿수를 헤아려 보면 그다지 변화가 없는 전형적인 소비도시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2개의 철도 노선이 서로 교차하는 - 비록 그 중 한 개 노선은 단선이었지만 - 장점을 부각시킬 수 없어 새마을호 열차도 거의 정차하지 않던 곳.
지금은 폐선되어 '철로자전거'라는 관광아이템으로 다시 태어났지만, 문경 가은읍 일대에서 생산되는 무연탄을 수송하던 산업철도의 연장선상에 아련한 흔적만이 남아 있는 그곳이 바로 나의 유년기 16년을 보낸 곳이었기에, 거대한 동물의 시체같은 서울에서 한 주를 보내고 주말이면 내려가야 하는 곳 또한 다를 바 없었다.
지금처럼 주 5일제 근무가 정착되지 않은 1990년대 후반, 내가 다녔던 회사 또한 토요일에도 규정된 근무시간을 채워야 했었고 IMF 를 전후하여 어려운 사정 덕분에 토요일도 오후 늦게까지 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토요일 저녁시간 즈음에 지친 몸을 이끌고 간단히 짐을 챙겨 집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227.6Km 에 달하는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고속버스에 몸을 싣거나, 아니면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 방법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간혹, 대전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가서 다시 기차로 환승하는 두 가지가 믹스된 루트를 택해서 가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 내가 선택한 교통수단은 고속버스였다.
토요일 퇴근시간이 일정치 않아 기차표를 예매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고, 혹 운이 좋아 즉석에서 표를 구한다고 하더라도 피곤에 절은 몸으로 깊은 잠에 빠지면 내려야 할 곳에서 못 내려 지나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는 노파심에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는 고속버스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것에도 걸림돌이 있었다. 워낙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던 데다가 중소도시였기 때문에 서울과의 사이에 유동인구가 그다지 많지가 않아서 버스의 배차간격이 1시간 30분 정도로 길고, 막차도 18시 20분에 일찍 끊어지는 등 조금만 늦게 일이 끝나도 집에 바로 갈 수 있는 직통노선은 탈 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택한 방법이 아예 23시경에 출발하는 대구행 심야우등 버스표를 이지티켓에서 인터넷을 통해 예약해 두었다가 - 지금은 고속버스운송사업조합과 이지티켓으로 이원화되어 있다 - 일이 조금 일찍 끝나면 기다려서 타는 방법으로 동대구 한진터미널에 새벽 3시경에 도착하면 조금 걸어서 동대구역까지 간 다음, 04시 15분에 출발하는 서울행 첫 통일호를 이용해 김천까지 이동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바로 동대구에 조금 일찍 도착하거나 하면 열차 출발시각과 거의 1시간 반에서 2시간 가량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뚜렷한 우리나라의 사계 중 봄, 여름, 가을까지는 별로 지장이 없는데 반해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에는 고속터미널에서 동대구역까지 걸어가는 일조차 고역이었을 뿐더러 - 4시간 동안을 내리 자다가 일어난 직후에는 - 동대구역에 가서도 마땅히 시간을 보낼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조금 시간이 많이 남는 날에는 역사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게 되었고, 고속터미널에서 걸어오는 방향의 역사 바깥쪽에 냄비우동과 어묵, 즉석햄버거 등을 팔던 가게가 있어 우연히 한 번 들렀다가 그곳의 냄비우동 맛에 반한 뒤로는 이 냄비우동을 먹기 위해서 일부러 시간 맞춰 심야우등을 타는 볼썽사나운(?) 광경을 연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닳고 닳아서 새까맣게 탄 흔적마저 배어 있는 양은 냄비에 약 1분간 끓여서 집게로 집어 쟁반에 올려주는 냄비우동과 단무지 맛이 가져다 주는 오묘한 조화와 함께 우동면발과 곁들여진 야채 토핑들 사이로 꼭꼭 숨어 있거나 아예 위에 올라타 있는 조그마한 계란 토핑을 찾아내 '터뜨려 먹을지 흰자위만 풀어서 먹고 노른자위는 반숙을 만들어 먹을지' 등을 고민하는 따위가 시간을 보내기엔 아주 그럴싸했다. - 적어도 범인(凡人)들이 하지 않는 행동과 생각을 일삼는 나의 대뇌피질 구조하에서는 말이다 -
우동을 다 먹고 난 뒤에도 손님이 많지 않으면 훈훈한 온기를 맞으며 따뜻한 곳에서 열차를 기다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 실상은 새벽열차를 타러 오는 승객들 중 아침을 못먹은 사람들이 많기 떄문에 겨울에는 거의 빨리 먹고 비켜줘야 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 신문도 보고 여하지간 앉아서 남은 시간을 떄울 수 있는 좋은 장소를 제공했기 때문에 둘도 없는 아이템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통일호 객차가 사라지고, 무궁화호로 승격되면서 열차 출발시간이 뒤로 조정되어 04:30분에 출발하는 것으로 바뀐 뒤에도 한동안 이 냄비우동을 애용했었지만 1999년에 오너 드라이버가 되면서부터는 내 머리속 기억의 강 저편에 자리잡은 이 훌륭한 아이템은 잊혀지는 듯 했다.
얼마의 시간이 더 흐르자 민자유치로 지어진 복합역사가 들어서고 각지의 역들이 화려하게 탈바꿈하면서는 레시피 같지 않은 레시피와 포장된 상태의 면발을 앞세운 천편일률적인 '홍익회 플랫폼 우동'의 가공할만한 물량공세 앞에 냄비우동집은 일순간 사라져 버렸고, 옛날 생각이 나서 가게가 있던 곳을 찾았을 때에는 이미 동대구역도 민자유치로 지어진 신역사가 커다란 아가리를 벌린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얼마전 인터넷 검색을 하다 우연찮은 기회에 동대구역 냄비우동에 대한 찬반양론(?) 내지는 갑론을박(?)이 오고가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얻을 수 있었던 정보는 '동대구 신역사 안 롯데리아 옆에 냄비우동을 파는 가게가 있다'라는 얘기였는데 '맛있다'와 '그냥 우동이네'라는 두 가지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것을 보고 역시 음식 맛은 다분히 '먹는 자의 주관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동대구역에서 추운 겨울날 새벽 냄비우동을 즐겨 먹곤 했었던 것을 추억하며 그리워하는 이유 또한 다름아닌 냄비우동의 '맛있는 맛' 때문이 아니라 양은냄비에 담겨져 나오는 냄비우동을 후후 불어가며 먹던 시절에 대한 향수 때문이니까 말이다.
아직 동대구역 신역사 내에 존재한다는 냄비우동 가게를 찾아가 보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서울 가는 길이나 내려오는 길에 한 번쯤 꼭 들러서 다시 먹어볼 생각이다. 이상야릇한 옛날 생각을 더듬더듬 머릿속 어느 구석에선가 끄집어 내어 곱씹으면서…
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몇 번 동대구역에 가거나 올 일이 있었지만 그냥 무심코 지나치게 되는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양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팽창해버린 역 건물의 화려함 이면에 감춰진 옛날의 그 정서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내가 나이를 먹고 둔감해진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서글퍼진다.
냄비우동 한 그릇에 60분 남짓한 시간을 투자하며 즐길 수 있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너무 아둥바둥 입에 풀칠하는데 바빠서 내 앞에 주어진 자그마한 행복을 즐길만한 여유조차도 사라져버린 현실에 목놓아 마음으로 통곡해 본다.
"오는 2월 28일이면, 그간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KT(옛 한국통신공사)의 하이텔(HiTEL) VT 터미널 서비스가 긴 겨울잠을 뒤로 한 채 역사속의 뒤안길로 사라질 예정"이다. 현재 남아 있는 천리안이나 나우누리 같은 여타의 VT 터미널 기반 서비스들도 결국은 하이텔과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임은 마치 역사적인 사명이요 운명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서울지하철 4호선 하행선이 안산, 오이도까지 연장되면서 - 지금은 폐선되어 흉물스러운 철로의 흔적만 남아버린 - 수원에서 인천 소래포구 사이를 오가며 삶의 애환을 실어나르던 수인선 협궤열차의 조금 더 오래된 이야기가 갑자기 떠오르며, 그와 동시에 가슴 한 구석이 찡해옴을 느낀다.
사라져버린 것들이 갖는 허전함과 아쉬움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고속철 KTX가 가져다 주는 고속 이동의 이점과 2시간 생활권이라는 캐치 프레이즈"에 대비되는, "도시 통근형 통일호의 전신인 비둘기호 열차가 주는 느긋한 시골 풍경의 여유"가 그렇고, "현세의 초고속 인프라를 기반으로 한 인터넷 환경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느끼는 편리함과 신속함"에 대비되는 저 옛날 PC 통신 환경의 "책임감이 수반되는 인간미에 대한 향수"가 그럴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인 1991년 10월 2일, MBC 9시 뉴스데스크 시작을 알리는 삼성 돌체 시계의 우렁찬 발자국 소리와 함께, 나는 현대전자의 내장형 2400bps MNP Class 5 모뎀을 구입해 당시 사용하던 - 역시 현대전자의 제품인 - Super 16S XT PC의 슬롯에 장착하고 역사적인 첫 다이얼업(Dial-up) 모뎀을 통한 온라인 담금질을 시작했었다.
당시 내장형 2400BPS 모뎀의 가격은 18만원대였는데, 에러 보정기능과 압축 기능이 있는 MNP Class 5 옵션, 그리고 1200bps 모뎀과 비교했을 때 2배의 전송속도는 그 정도의 비용을 지불할 만큼 정당하다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했었다.
Super 16S - 이하 16S - 는 10MHz 클럭의 인텔의 8086 계열 CPU와 근원을 알 수 없는 ISA 허큘리스 그래픽 보드가 장착되어 있었고, 64KB 메모리칩 8개 또는 32KB 메모리칩 12개로 이루어진 512KB의 메인메모리에 하드디스크도 없이 5.25인치 360KB 2D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만 2개가 덩그러니 전면의 Drive Bay 에 고정되어 있는,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그런 시스템이다.
파란색의 플라스틱 재질 전원 버튼을 누르면, 메인보드와 연결된 점퍼에서 단락을 일으켜 180W 용량의 파워 서플라이가 요란한 굉음을 내며 팬을 가동시키면서 16S가 잠에서 깨어난다.
집에 16S를 두고 있으면서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봤자 CTRL + 엔터키의 조합으로 CPU 의 터보 ON/OFF 토글 기능을 왔다갔다하며 2.77MHz 와 10MHz 의 차이를 몸소 체험해 보는 것과, 겨우 열 개 남짓한 바이러스를 검색하고 치료할 수 있는 - 몽키 바이러스나 브레인 바이러스, 다마네기 바이러스, 예루살렘 바이러스 등 - 안철수님의 V2 PLUS 라는 백신 프로그램을 이용해 시내 모처의 컴퓨터 판매점에서 복사해 온 게임 디스켓의 바이러스를 검사하는 따위의 단조로운 일들 뿐이었다.
그런 시스템에 모뎀을 장착하면서부터는 오프라인 환경에서 우물 안 개구리와 같았던 컴퓨팅 환경이 전화선을 통해 전국 각지에 있는 사람들과 연계되는 온라인 환경으로 변모하면서 무수히 많은 부분이 변화하고 발전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디오텍스(Videotex) 기반의 데이콤의 천리안 II - 지금의 천리안, 97년 이전 한국데이터통신(주)의 PC-Serve 서비스가 전신이다 - 라든가 대우증권 Dial-VAN 같은 증권정보 서비스,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서비스하던 KETEL 서비스 - 지금의 HiTEL 서비스의 전신이다. 한경 KETEL 을 KT에서 인수하면서 유료화로 정책이 변경되었다. - 그리고 전국 각지에 산재한 개인 사용자들의 사설 BBS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서비스들이 모뎀과 전화선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는 '빨리빨리'와 같은 한국인들의 급한 성격을 자극해 지금의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 세계 1위의 제국에 이르는 초석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림 2] 옛 PC-Serve 시절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천리안의 대화오락실에 <이야기 멀티>로 접속한 모습
그도 그럴만한 것이 2400bps 라는 속도가 가져다 주는 한계 - 이후 몇년사이 14400bps 나 28800bps, 33600bps, 더 나아가서는 디지털 전용회선에 맞먹는 56Kbps급 모뎀이 출시되고 널리 보급되었지만 - 는 실로 엄청난 것이어서 1MB 짜리 파일을 다운받기 위해서는 약 1시간 가량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 1MB = 1,024KBytes = 1,048,576Bytes ※ 2400bps = 2400 baud per second 또는 2400 bit per second 로 초당 전송률을 나타냄 ※ 1Byte = 8Bit 이므로, 2400bps 모뎀은 이론적으로 초당 300Bytes를 전송 ※ 1,048,576Bytes 를 300Bytes로 나누면 3,495초가 되는데 이는 분으로 따지면 약 58분이다.
이렇듯 열악한 환경에서 비싼 전화요금과 상용서비스의 경우 분당 이용료까지 부담을 해가며 살인적인 금전투자를 서슴지 않고 계속하면서 PC통신에 몰입할 수 있었던 보이지 않는 저력의 근원은 도대체 무엇일까?
실제 사례를 들어 한번 살펴보면, 서울이나 대구 같은 대도시에는 일찍부터 시내전화요금에 "시분제"라는 것이 도입되어 실제 사용하는 통화량만큼 종량제로 과금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내가 살았던 인구 10만도 안되는 지방의 작은 중소도시에서는 3분에 20원 - 한때는 공중전화에서도 십원짜리 두 개면 넉넉하게 할 말 다 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어렴풋이 기억은 난다 - 이면 끊을 때까지 계속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하루에 한 시간씩 PC-Serve 에 접속해서 채팅이건 동호회 활동이건 여러 가지 유희(?)를 즐긴다고 했을 때, 일단 전화요금은 3분에 20원씩, 하루에 400원, 한 달이면 30일 기준으로 12,000원이 부과된다. 그리고, 지금의 LG데이콤의 전신인 한국데이터통신(주)에서 서비스하던 PC-Serve 의 초창기 이용료는 1분에 25원으로 한시간이면 1,500원 한 달에 30일 기준 45,000원이 부과되었다. 부가가치세 10%를 포함하면 시내전화요금 13,200원 + 통신서비스 이용료 49,500원 해서 합계 52,700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해야만 했던 셈이다.
다행히 PC-Serve 에는 기본료가 부가세 포함해서 사용하지 않아도 11,000원씩 부과가 되었고 이 기본료로는 한 달에 20시간의 사용시간이 기본적으로 제공되었다. 20시간이 많아 보이지만, 채팅하고 이것저것 동호회 둘러보고 자료실 조금 이용하면 하루 2-3시간은 기본적으로 간다. 지금도 "USE" 라는 명령어를 사용해서 매번 사용시간을 체크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중에 시내전화요금이 단계적으로 인상되면서 3분에 35원, 3분에 40원 식으로 계속 올라가면서 바로잡아졌지만 초기에는 전화요금보다 서비스 이용료가 더 큰 그야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상황이 벌어졌던 셈이다.
1992년 2월, PC-Serve 에 바둑동호회를 개설해서 초대 대표시삽을 하는 동안에도, 소비자에게는 살인적이고 회사는 노다지를 캐는 수익구조로 인한 수난은 계속됐다. 이른바, 우수동호회를 선정해서 매월 발표하면서 그에 부합되는 혜택을 부여했는데 운영진에게는 ZS로 시작하는 무료 운영용 아이디를 제공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ZS 뒤에는 일반적으로 바로가기 명령에 해당되는 Go 명령의 뒤에 오는 파라미터와 같은 인덱스명이 따라붙었고, 아이디가 추가로 발급될 경우에는 숫자를 부여했다.
바둑동호회의 경우 GO BADUCK 이라는 인덱스명을 사용했는데, 아이디의 최대 자리수가 8자리였기 때문에 ZSBADUK 이 대표시삽의 아이디였고, ZSBADUK1 이 부시삽1, 그 다음이 ZSBADUK2 식으로 사용시간이 한때 전체 동호회를 통틀어 3위 안에 드는 얼마 동안은 ZSBADUK4까지 총 5개의 무료 아이디를 발급받아 많은 혜택을 봤던 기억이 난다. 그에 수반되는 책임과 의무도 막중했지만 말이다.
[그림 3] 천리안의 텍스트 기반 사용자 정보 수정화면. 6번 항목의 <호출기>가 눈에 띈다.
여담이지만, 충청지역동호회(GO CHUNG)라든가 지금은 인터넷상에서 앳(@)파일이라는 사이트로 변모한 아트미디어 동호회, 게임과 만화를 다뤘던 환상동호회 같은 곳들이 사용시간 기준으로 우수동호회에 자주 올랐던 곳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소는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비용을 부담하면서도 꿋꿋이 부모님이 잘라버린 검정 피복의 구리전화선을 창틀이나 장판, 벽지에 실리콘 총으로 발라버리는 투혼(?)을 발휘하면서까지 계속 PC 통신에 몰입할 수 있었던 저력의 원천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정신 그리고 기본적인 에티켓은 준수하며 서로에 대한 예의를 갖출 줄 알았던 책임감과 더불어 온라인상에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유일한 식별자(Identifier)였던 자기 아이디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현재의 인터넷 환경처럼 가정교육을 파트타임으로 받은 쓰레기 같은 인종들이 난무하는 멀티태스킹의 바다가 아니라, 동호회나 클럽의 소위 '지하실'이라 불리우는 자그마한 채팅방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오로지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던, "멀티태스킹 서버 속 싱글태스크 모드"의 매력 또한 거기에 일조하지 않았을까?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지금은 타이핑만 빠르면 메신저로 양다리 아니라 대여섯 다리도 가능하지만, 그땐 그게 불가능했다. /A 명령어 한 방이면 누가 어디에 가서 무얼 하는지 다 알 수 있었고 - 결국 이것도 유닉스 쉘에 있는 finger 명령의 응용버젼이겠지만 - 채팅실에 입장해 있는 동안 다른데로 이동할 수가 없었다.
온라인 매체에서 하이텔 VT 서비스의 중단 소식을 접하고 나서 참으로 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마치 자주 만나진 못하지만 아주 오래된 벗 하나가 요단강 건너 북망산천으로 훨훨 날아가는 것처럼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옴은 비단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겨울은 몸도 마음도 추워야 하는데 올 겨울은 유난히도 따뜻한 날이 많은 것 같다.
시간은 계속 흐른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흐를 것이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어야 할진대, 문명의 이기가 가져다 준 과거 기억의 편린을, 앨범 속 아주 오래된 한 장의 흑백사진처럼 단지 가슴속에 묻기만 해야 하는 것인지 자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