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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가쪽 어른들이 모두 돌아가신 95년 이후로 발길이 뜸해질 수 밖에 없었던 영덕을 다시 찾은 것은, 읍내를 지나 축산면에 있는 작은 마을에 볼일이 있어서였다.

   새로이 개통된 대구-포항간 고속국도(일명 대포고속국도)를 타고 1시간 남짓한 시간을 달리자, 익숙한 해변을 끼고 7번 국도의 수려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 수학여행 왔던 학생들이 사진을 찍다 실족사했다는 얘기가 왕왕 들리던 - 보경사가 있는 청하를 지나 두어 개쯤 있는 군부대 위병소를 지나치자, 20년 전쯤엔 까무잡잡한 얼굴에 눈매가 매서운 해병대 헌병들 - 빨간 글씨의 하얀 철모 - 이 버스에 올라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를 외치던 검문소를 만난다.

   지금은 교통량이 많이 늘어서인지 아니면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 무장탈영이나 중요한 범인의 도주로 차단 등 - 불심검문이 없어진 탓인지 지나다니는 버스를 세우고 검문검색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새로이 단장한 화진휴게소의 모습과 경보화석박물관,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음식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어촌마을들을 지나치기를 여럿, 그나마 머리속 어느 구석엔가 다소 익숙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강구사거리가 나타난다.

   7번 국도와 영덕은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본적이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306번지이기도 하지만, 부모님의 고향이 근처에 자리한 탓도 있고 어릴적 첫 여행에 대한 기억의 대부분이 보통 서너시간은 버스를 타고 외가집에 가던 방학중이나 주말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동에 관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예천, 안동을 거쳐 청송보호감호소가 있는 진보면을 지나가는 5시간 거리의 제1코스와 구미, 경주에 연하는 경부고속국도를 달려 포경산업도로를 지나 7번 국도로 접어드는 제2코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던 유년시절의 외가집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특히 가는 길보다는 돌아오는 길이 더욱 그랬는데, 오랜만에 온 외손자들을 위해서 만들어둔 장류와 마른반찬 등을 잔뜩 싸서 담아주시는 외할머니 덕분에 돌아오는 길 식구들은 빈 손이 없을 정도로 들고, 메고, 짊어지고 버스를 타고 오곤 했었는데, 영덕에서 포항이나 안동까지는 버스가 자주 다녔지만 포항이나 안동에서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터미널에서 체류하는 시간이 무척 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식사 이후 4차선으로 확장된 새로운 7번 국도를 달리며 영덕읍내를 지나칠 무렵,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자주 드나들던 때에는 작은 변화에 둔감해 잘 몰랐던 것들이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근근이 몇 번 들르지 못하는 동안에 큰 변화로 탈바꿈해 이제는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매일이 다분히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 속에서 전동차에 치인 듯 멍한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 동안에 느끼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감각과는 다른 어떤 느낌이 뇌리를 스친다. 하루하루가 빠르게 흘러간다고 느끼면서도 정작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시간의 발자국 소리 자체에 대해서는 둔감했던 내 자신이 아차 싶었다.

   길어야 100년, 얼마 주어지지 않은 시간을 알차게 그리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지난 시간의 우유부단함과 부화뇌동에 대한 자숙의 동기를 7번 국도와 영덕의 변화가 부여해준 셈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회상의 강을 건너는 동안, 산산이 조각난 채 강바닥 어딘가에 머물러 있던 기억의 편린을 무수히 건져내며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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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5 21:53 2007/03/15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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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란 한 판으로 장정 30명을 울리는 것이 가능할까?

   정답은 "몇 년 전에는 가능했다"가 정확할 것 같다. 그리고, "군대에서"라는 전제조건이 따라붙는다면 말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가능할 지도 모를 일이다. 어떻게 가능한 일이냐고? 육해공 상관없이 현역으로 병역을 필하신 분들은 이미 이때쯤 되면 빙그레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머금고 계실거라 생각한다.

   아시는 바와 같이, 그리고 상상하시는 바와 같이 군대조직도 사람 사는 동네인지라 때가 되면 밥짓는 소리와 냄새로 아우성이다. 수십년 전 우리 부모님 세대가 군대에서 시간을 보내던 시절의 배고픈 이야기가 아니라, 힘든 훈련을 마치고 귀영한 뒤 갖는 식사시간만큼 기다려지는 시간은 없을 것이다.

   기준량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 기준량에 인원수를 곱해 미리 산출되고 계획된 양이 공급되는 식재료의 제한상 더 먹고 싶어도 더 먹을 수가 없고 -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더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왕왕 생기기도 한다 - 덜 먹고 싶어도 정도껏 먹어주는 센스를 발휘해야 하는 것이 군대조직이다. 식사시간 또한 표준일과표에 명시되어 있는 일종의 명령이자 지시사항이므로 무단으로 식사를 거르는 일 또한 금기사항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식사를 거르게 되면, 이유를 불문하고 그것은 곧 보이지 않는 국방력의 손실이자 세금의 낭비로 귀결되는 연유에서 비롯되는 일이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서 계란 한 판으로 장정 30명을 울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살펴보자. 1,000명이 생활하는 부대에서 1인당 계란이 1개씩 기준량으로 책정되어 있는 요리가 나온 상황을 가정하고, 970명이 식사를 마쳤을 무렵에 누군가 30명이 계란을 1개씩 슬쩍했거나 더 먹은 사실이 발견됐다면 그 뒤에 벌어질 일은 사뭇 자명하다. 특히, 장기간 부대 외부의 야지에서 치러지는 훈련기간중이라면 그 상황은 더욱 심각하기 짝이 없다.

   통제되고 제한된 영역에서 정해진 계획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위축될 대로 위축된 오감과 더불어 조그마한 일에도 민감해지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환경적응능력 덕택에 심신이 피곤한 상태에서 970명의 뒤에 식사를 하게 되는 30명이 계란을 먹지 못하는 사실에 대한 반응은 정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오게 된다.

   왠지 모르게 섭섭하고, 남들 다 먹는 - 무려 970명이나 앞에 식사한 사람들이 다 먹은 - 계란 1개도 먹지 못하는 자신이 초라해지면서 갑자기 서글픔이 몰려온다. 이는 단순히 계란에 대한 - 군인 외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흔하디 흔한 - 섭식욕구 해소가 안되어 발생하는 욕구불만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충성클럽(PX)에서 빵이나 냉동식품 등 다른 대체식품으로 주린 배를 채울 수는 있지만, 계란을 먹지 못한다는 그 순간의 정신적인 충격은 오랜 기간 사귀던 연인과 헤어질 때의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과는, 두산 엔사이버 백과사전 고스톱 카테고리에 등재된 형용사(?) 중 "쇼당도 붙이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격차가 있다.

   '어떤 새X가 내 계란을 먹었을까'라는 의구심에서 비롯돼 서서히 증폭되는, 이미 식사를 하고 간 전우에 대한 불신과 불만, 그리고 심한 경우 증오에서 나타나는 서글픔은 결국, 공룡 코딱지만한 눈물로 승화되는 귀결을 낳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운다고 해서 없던 계란이 다시 생기지는 않는다. -_-b

   중요한 것은 1,000개 중 1개는 "당연히 내 계란"이라는 투철한 소유의식과 지칠줄 모르는 섭식에 대한 애착, - 절대 집착이 아니다 - 그리고 후라이를 해먹을 수 없다는 계란요리 레시피상의 한계 때문에 일어나는, 일종의 "사나이의 로망"에 대한 끓어오르는 그 무언가에 있다. -_-b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부대 규모가 커질수록 계란 후라이를 해먹을 수 있는 확률은, 하루 동안 같은 자동차에 12번 치일 확률보다 낮다는 로또복권 1등 당첨의 그것보다도 더 희박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많은 인원이 먹을 음식에 대한 조리시간상의 문제 때문이다.
   
   육군에서는 - 솔직히 공군이나 해군, 해병은 경험해 보지 않았으므로 육군으로 국한하는 것이지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인원수가 적기 때문에 훨씬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 이런 웃지 못할 해프닝을 방지하고 장병들의 건강한 식생활을 도모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과 투자를 하고 있고, 그 효과는 개선되어 가는 식단과 식재료의 품질, 그리고 결과물인 요리의 맛과 영양으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귀한 자식을 나라에 맡기고 2년 동안 노심초사하며 제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릴 우리네 부모님들의 근심걱정을 덜어주는 길이자,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입대한 장정들에 대해 국가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이자 관심의 표명이기 때문이다.

   지휘계통과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계급사회인 군의 특성상 다소는 민간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경직된 느낌을 주는 부분이 상존할테지만, 적어도 없어서 못먹던 옛날의 그 시절과는 대비되는 부분이 정말 많이 눈에 띈다. 체력적인 소모를 수반하는 훈련을 할 때면 그 강도를 고려한 고영양식이 나오는 경우라거나, 배가 덜 고픈건지 양이 많아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편식하고 남기는 모습을 보면, 멀쩡히 집도 있고 차도 있고 가정까지 있는 사람이 밥 굶어죽을 뻔 했던 IMF 구제금융 수혜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구워서 자를 줄 안다고, 굶어 본 사람만이 배고픔에 대한 기억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한번쯤은 인생을 살면서 배고픈 시기가 도래해 일정기간 굶주림에 찌들어 보는 것이, 보다 인간이 정신적으로 강해지는 초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두서없는 글에 마침표를 찍는다.

   - 일하다 보니 저녁 굶은 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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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0 00:40 2007/03/10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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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다음의 네 가지 인간유형 중, 군 조직에서 가장 빨리 사라져야 할 인간의 유형은 어떤것인가?"
  
   첫째, 부지런하고 머리 좋은 사람.
   둘째, 부지런하고 머리 나쁜 사람.
   셋째, 게으르고 머리 좋은 사람.
   넷째, 게으르고 머리 나쁜 사람.

   여기까지 읽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마도, 네 번째의 "게으르고 머리 나쁜 사람"을 마음 속으로 외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정답은 두 번째, 부지런하고 머리 나쁜 사람이다. 처음 보았던 얘기의 정답 또한 두 번째였던 것 같다.

   부지런하니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일을 찾아내고 만들어 내는데 반해 머리가 나빠 뒷감당이 안되니 다른 사람들에게 그 파장이 미쳐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어디까지나 웃자고 만들어 낸 이야기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언중유골이다. 비단 군대조직 뿐만 아니라 기업이나 학교같은 둘 이상의 다수가 모이는 울타리 안에서라면 통용될 수 있는 논리가 숨어 있다.

   실제 상황은 어떤지 한 번 살펴보자.

   오늘 아침 출근길 직후에 가진 티타임에서, 나를 비롯해 3명의 동료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 명은 술도 끊고 커피 자판기도 끊고(?) 담배마저도 끊을려고 발악해 가면서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상황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요 근래 몇 년간 흡연량이 부쩍 늘어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겨버린 상황에 처해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내가 서 있다.

   "요즘 운동할 때 다리가 풀려서 힘들어 죽겠어." 다이어트 중인 인간의 한숨 섞인 푸념이다. 남들 다 부어라 마셔라 하는 회식자리에서조차 맥주 한 컵을 못다 먹은채 아쉬움으로 주린 배를 달래며 일어서야 하는 정말 애처로운 알콜형 인간의 형상이다. 불쌍하지 않은가?

   흡연량이 부쩍 늘어 담배 없인 하루가 아니라 1분 1초도 버티기 힘든 니코틴형 인간도 절대절명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끊임없이 작업을 시도하고 있는 아가씨와 좀 더 근접거리에서 진도를 쌓아가려면 금연은 필수기 때문이다. 아마도 여자와 담배 둘 중 하나는 끊어야 할 지도 모른다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어댄다. 역시, 불쌍한 인간의 형상이다.

   반면에 술 담배 커피 등등 인간이 즐길 수 있는 기호품이란 기호품 그리고 음식이란 음식은 마다하지 않으면서 막강한 소화흡수분해능력을 자랑하는 나같은 하이브리드형 인간도 있다.

   남들은 하루에 두잔 이상 먹는걸 죄악시 내지는 생명단축의 지름길로 여기는 커피를 하루에 열 잔씩 꼬박꼬박 시간당 150cc 정량으로 투입하고 있는 카페인 킬러에다, 잠자기 전에 먹고 잠들면 관상이 바뀐다는 공포의 라면야식도 얼마든지 먹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날 일어날 수 있는 신진대사능력과, 알콜을 분해하는 플랜트라도 몸 속에 있는 것 마냥 술 먹고 밥만 든든하게 먹어주면 후환이 절대 없는 것이 바로 진정한 하이브리드형 인간의 정의다.

   커피 마시면 잠이 안와서 18시 이후에는 절대 커피를 안먹거나 못먹겠다고? 밤새 시험공부하겠답시고 캔커피 10개 사다놓고 홀짝거리면서 마시다 종국에는 배불러서 잠들어버리는 게 바로 하이브리드형 인간의 진면목이며, 하루에 담배를 한 갑씩 때워도 1.5Km 정도는 너끈하게 6분대 초반에 주파할 수 있는 근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하이브리드형 인간의 저력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하이브리드형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신경질적인 요소를 내포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섭취하는 열량과 평소의 생태학적 관점(?)에서 보여지는 여러 가지 요인들은 엄청난 체중의 증가를 가져올 만한 것들이 많은데 반해 실제 외형상으로 나타나는 일말의 부작용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예민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조그마한 일에 연연하며 밴댕이 같은 속내를 자랑하지 않느냐 하는 추측을 가져올 만 하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실상은 이렇다.

   남들보다 조금 더 큰 보폭과, 남들보다 좀 더 빠른 걸음걸이와, 선천적으로 땀의 배출량이 많고 일부러라도 몸을 움직이는 버릇을 몸에 잘 들여놓는다는 것. 그래서, 생활 자체가 쉴새 없이 움직이는 운동의 연속이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는 것. 띄엄띄엄 본다면 운동도 안하고 커피 찌개(?)를 즐기는 미식가 정도로 보이겠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면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내재되어 있다.
  
   이를테면, 5층에 있는 집에서 하루 두 번 출퇴근할 때 계단을 이용하는데 일부러라도 2-3칸씩 뛰어오르거나 뛰어내려가고, 범인(凡人)들이 걸어가기엔 멀다고 생각하는 거리도 너끈히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하체와 허리근육이 단련되어 있다. 2000년도까지만 해도 정말 귀차니즘의 진수를 보여주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그야말로 참살이형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 2000년에는 같은 사거리에서 좌측 대각선 블럭에 있는 사우나에 가는 것도 걸어가기 귀찮아서 차를 끌고 갔다오곤 했었다. -_-b -

   인간의 유형에 대해서 논한다는 제목으로 시작해서 주절대다 보니 어느새 자랑 아닌 자랑이 되어버렸는데, 결국 몸을 많이 움직이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 기계도 주기적으로 자주 써주지 않으면 녹이 슬고 정상적인 동작을 하지 못하게 되듯이 인간의 몸 또한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자꾸 사용하고 움직이게 되면 거기에 부합되게 단련되고 익숙해져서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난 뒤에는 더 큰 벽도 넘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의 능력은 무한대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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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9 01:09 2007/03/09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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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C 통신을 처음 접한 1991년 이후 온라인상에서의 다른 PC 또는 사용자들과의 연계성에 골몰하며 지냈을 무렵, 사설 벼락쪽(BBS: Bulletin Board System, 전자게시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사용자의 입장에서 케텔(KETEL)이나 PC-Serve와 같은 대형통신망 또는 개인이 운영하던 사설 BBS에 접속해 활동하던 것에서 탈피해 무언가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싶은 욕구에서 발현된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시 내가 보유하고 있던 장비는 고작 메인메모리 512KB, CPU 클럭 10MHz 의 초라한 XT PC 뿐이었고, 지금은 흔하디 흔한 필수장치가 된 하드디스크가 없었다. 사설 BBS 를 오픈하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우선, 보조기억장치의 용량 한계를 뛰어넘어 게시판이나 자료실의 데이터를 저장할 하드디스크를 PC 에 장착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삼성전자와 PC 를 샀던 현대전자 등 여러 군데에 견적을 받고 문의를 한 결과 손에 쥐게 된 것은 시게이트社에서 나온 MFM 방식의 62MB 하드디스크였다. 메가당 5천원이라는 비용부담을 떠안고 62MB 하드디스크를 장착한 후에 MS-DOS 를 부팅하면서 반짝거리는 하드디스크의 전면부 패널의 적색 LED 램프가 반짝거리는 것을 보며 흐뭇했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하드웨어적으로 준비가 된 다음에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것이 바로 호스트 프로그램을 선정하고 셋업해서 정상적으로 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었는데, 이는 예상외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와일드 캣(WildCat)이나 RBBS-PC와 같은 외국산 프로그램이나 곰주인, 밀키웨이, 호롱불과 같은 국산 호스트 프로그램들이 이미 대형 PC통신사의 자료실에 많이 공개되어 있었고, 운영자들이 할 일은 메뉴얼을 숙독해 트리구조로 되어 있는 메뉴파일을 작성하고, 각각의 메뉴에 맞는 스크립트(사용자에게 보여질 화면) 파일을 작성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의외로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대형 통신망과는 달리 지역의 PC통신인들을 위해서 아기자기하고 지역정보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고심했고, 마침내 1992년 4월 최오길님의 호롱불 호스트 3.82C 버젼을 이용해 History NET 이라는 사설 BBS를 오픈하기에 이르렀다.

   도농복합형 도시로 탈바꿈 하기 이전 순수하게 인구 10만명도 안되는 지방의 중소도시에서 PC 통신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초반에는 회원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면서 입에서 입소문을 타고 가입자는 한 명씩 늘어나기 시작해서, 운영을 개시한 지 약 2개월이 지났을 무렵에는 회원수가 약 50명에 이르렀다.

   시내에 있는 교회의 목사님이나 컴퓨터 가게 사장님, 그리고 같은 학교에 재학중이던 친구, 선후배들을 필두로 점점 접속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인근의 구미에서는 이 무렵 모처의 컴퓨터 가게에서 운영하던 "선주골"이라는 멀티노드 사설 BBS가 운영중이었는데, 유닉스와 유사한 제닉스 OS 기반에 호스트 프로그램을 얹어 최대 4명까지 동시에 사용이 가능했다.

   컴퓨터 가게가 아닌 개인 입장에서 그것도 10대가 거액의 투자비용이 들어가는 멀티 시리얼 카드나 외장형 모뎀, 그리고 전화선 등을 설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단일노드 환경의 BBS에서 무언가 더 발전시킬 만한 촉매가 없을까 고민하던 차 호롱불 호스트에 있는 네트메일 기능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이는 지금의 인터넷 메일을 주고 받는 시스템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듯 싶다.

   호롱불 호스트의 네트메일 시스템은 A 라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중앙국"이 하나 존재하며, - 중앙국은 호롱불의 개발자인 최오길님과 또 다른 한 사람이 운영했고, "알파넷"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 이 중앙국은 각 지역별로 다수의 중계국을 두게 되고, 이 중계국은 또 다시 하위에 다수의 회원국을 가지는 이른바 트리구조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면서 동일한 호롱불을 호스트로 사용하는 BBS 간에 메일이나 게시물을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 운영되는 것이다.

   나는 당시 공석이던 경북지역 중계국 노드로 가입을 신청했고, 중앙국인 알파넷에서 승인이 떨어져 노드리스트 파일과 네트메일에 필요한 몇 가지 부수적인 파일들을 중앙국으로부터 전화접속을 통해 제공받은 뒤 실질적으로 구동이 가능하게끔 약간의 부수적인 설정을 호스트 프로그램에 맞춰주는 작업을 했고, 이후 경북중계국으로 서울의 중앙국인 알파넷에 네트메일을 위한 첫 자동접속을 지켜보던 그 때의 기분은 정말 환희 그 자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설 BBS의 운영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비공식적으로 김천에서는 제1호 단일노드 사설 BBS 개국 기록을 남겼고, 집에서 사용하던 KT 의 일반전화를 같이 사용하는 것이었기에 24시간 운영을 하지 못하고 - 당시의 사설 BBS 들 대부분이 야간에 제한적으로 운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 22시부터 06시까지 하루에 8시간씩만 운영했지만, 사용자들 대부분 역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주간에는 접속할 여건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그다지 큰 문제는 없었다.  

   인터넷 기반의 Telnet, Gopher, FTP 같은 서비스나 지금의 웹 포털들이 자리잡기 전까지 수많은 경험을 하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과 서비스들을 접해보았지만, 약 1년간 이어졌던 이 사설 BBS 운영 시절만큼 색다르고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은 이후에 없었던 것 같다.

   아쉬운 게 있다면, 단일노드 환경이라 운영자(SYSOP: System Operator)와 접속한 사용자 단 둘만이 존재하는 - 지금의 멀티태스킹과 멀티유져가 보편화된 시점에서는 엉성하고 어딘가 어색하기 그지없는 - 공간이라 조금은 답답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관심사와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밤새워 토론하고 이야기하던 문화 자체를 즐기던 경향과 더불어 익명성을 배제한 채 서로에 대한 예의를 갖출 줄 알았던 그 시절, 동시대를 살았던 절대 다수 통신인들의 에티켓에 경의를 표하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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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4 23:18 2007/03/04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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